90 years 최초, 최고, 차별화의 90년 CJ대한통운 혁신물류 역사의 산증인 장갑수 고문님 인터뷰
2020. 01. 01

장갑수 고문님

1967
년 7월 초여름의 어느 날 오후, 26살의 청년 장갑수는 서울역 화물열차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부산에서 새벽부터 달려왔을 기관차는 지친 기색도 없이 우렁찬 기적소리를 울리며 화차들을 이끌고 플랫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화물열차를 바라보는 그의 가슴속으로 뿌듯함이 밀려 들어왔다. 오늘도 저 화차 안에는 받는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려왔을 온갖 물건들이 가득할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이 흘렀으나 살림살이는 여전히 팍팍하였고, 생활에 긴요하지만 부족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기적소리에 놀랐는지 시멘트 담벼락 너머 우마차에 매인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26세 물류인생

26세 물류인생

장갑수 CJ대한통운 통우회 고문은 50여 년 전 첫 회사 생활을 시작한 서울역을 그렇게 기억했다.
"회사 입사해서 처음 발령받은 곳이 서울지점이었습니다. 지금 서울 서부역사거리 자리인데요. 차급이라고 화물열차에서 내린 화물을 화물차나 우마차로 운송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요즘으로 치면 배차업무라고 할까요? 장비가 부족해서 지사에 화물차라곤 두 대뿐이었고 보통 우마차에 화물을 실어 보냈지요."
 
당시 서울역은 서울에서 필요한 모든 물건의 허브였다. 대량 화물의 장거리 운송수단은 철도밖에 없었던 시대, 서울역은 양곡, 무, 배추 같은 식품부터 의류, 비료, 시멘트 같은 생활필수품이나 각종 물자에 이르기까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화물의 종착지이자 받는 사람에게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때 서울역으로 들어오는 화물 중에 외자 물자가 참 많았습니다. 외국에서 선박으로 보내면 부산항에서 하역을 해서 다시 철도로 서울역으로 보내는 거지요. 밀가루 같은 원조물자도 있었고, 구제 의류라는 헌 옷들도 있었는데 이런 옷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지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31년이라는 재직기간 동안 사실상 물류 대부분 분야를 거친 장 고문. 그의 회사 생활 첫 출발점이 당시의 물류 허브였다는 점이 의미 있어 보였다.
 
26살 청년이 물류인이 되고자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 고문은 아버지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한다.


참 좋은회사

참 좋은회사

"당시엔 좋은 직장이라고 하면 은행과 환성(CJ대한통운의 옛 이름 중 하나)이 꼽혔습니다. 제대하고 사실 은행에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환성이 좋은 회사라고 추천을 하신 거지요. 국영기업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CJ대한통운에 입사한 장 고문이 처음 발령받은 곳이 서울지점이었다.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의 기억은 꼼꼼하고 정확했다.
"당시에는 신입사원은 본사로 바로 배치를 받을 수 없었어요. 어디가 되었든 현장 지점에서 근무를 해서 경력과 경험을 쌓아야 갈 수가 있었지요. 서울에는 지점이 청량리, 용산, 영등포, 서울 총 4개가 있었는데 서울지점으로 발령을 받게 된 거지요.”
 
그렇게 시작된 물류인으로서의 삶이 31년이나 지속될 줄은 장 고문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후 장 고문은 본사, 충주지점, 목포지점, 광양지사 등 본지점은 물론 민수, 국제물류 등 회사가 영위하던 대부분의 사업분야를 모두 섭렵했다.
 
31년간 재직하면서 그가 보아온 CJ대한통운의 역사는 '최초, 최고, 차별화'의 역사였다. 이전에 없던 영역을 개척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도 치열하게 부딪혀 마침내 성공을 이끌어 내는 도전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 그런 회사였다. 재직 중 인상 깊었던 기억에 대해 묻자 장 고문은 수십여 년 전 일들을 마치 어제 겪은 것 마냥 생생하게 풀어냈다.

CJ대한통운 역사

CJ대한통운 역사


"1970년 2월에 우리나라에 최초로 미국 맷슨(Matson)사 컨테이너 선박이 인천항으로 들어와서 대한통운(CJ대한통운 전신)이 하역을 맡게 됐습니다. 당시 회사를 다니면서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영어를 잘할 것 같아서 그랬는지 본사 컨테이너 담당자로 차출이 됐어요. 그런데 가서 서류를 보니 영어는 둘째치고 CY니, CFS니 하는 낯선 전문용어투성이였죠."
 
당시 국내에 컨테이너 물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리저리 자료를 수소문하고 조금이라도 컨테이너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갔다. 다행히 미8군에 근무하던 선배가 컨테이너에 대해 조금 지식이 있어 큰 도움이 됐다.
 
"서류 한 부를 번역하면 책 두어 권 분량이 나오더군요. 그때 참 고생을 많이 했지만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것에서 보람도 컸습니다."
특히 장 고문은 광양지사장으로 재임할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Ro-Ro(Roll In-Roll Out, 화물차량을 선박에 그대로 실었다 내리는 물류운영 방식) 시스템 도입에 참여한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Ro-Ro 시스템은 당시 해외에서는 운영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선박에 짐을 실은 화물차를 통째로 선적한다는 발상 자체가 생소한 시기였다.

삽화


장 고문은 고객사인 P社, 장비 제조사 관계자와 함께 한 달여 간 해외로 나가 현지를 답사하면서 Ro-Ro 방식에 대해 연구했다. 마침내 선적, 선박운송, 하역, 육로운송까지 One-Stop 운영체계를 구축하고 특수장비 도입과 운영 매뉴얼 제작까지 참여해 철강물류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기여했다.
 
국가적인 행사에도 대한통운(CJ대한통운 전신)이 빠질 수 없었다. 1988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면서 전담업체가 된 대한통운(CJ대한통운 전신)은 행사물류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된다. 장 고문은 당시 대한통운(CJ대한통운 전신)의 자회사였던 대한통운국제물류 상무로 근무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보낸 올림픽 스포츠 물자를 항공, 해상 컨테이너로 보내고 받는 업무의 핵심 과정을 총괄했다.

물류역사

역사


"이게 경주마 같은 생물도 있고, 장대높이 뛰기에 쓰는 장대, 요트 등등 별별 것이 다 있잖아요. 이게 손상이 나면 경기에 큰 지장이 되고, 경주마 같은 경우는 몇 억씩도 하는 것이니까... 취급에 굉장히 애로가 많았지요. 실무자들도 고생이 많았습니다."
 
실제 대한통운(CJ대한통운 전신)은 예민한 경주마 운송 시 소 등 다년간의 생물운송 경험과 학력까지 갖춘 전문 운전원을 선발해 배치했을 정도로 화물 운영에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서울 당인리 화력발전소 발전용 터빈의 운송도 장 고문의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다. 화물 무게만도 209톤인 이 사상 최대의 운송은 당시 공보처의 국립영상제작소에서 극장상영용 대한뉴스로 만들어져 전국의 극장에서 상영되기도 했었다.
 
“무게가 워낙 무거운 화물이다 보니 트레일러에 실었을 때 하중을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어요. 그러다가 아이디어를 낸 게 차축에 바퀴를 더 붙여서 하중을 분산하자는 거였죠. 또 한강대교(현 양화대교) 건너는데 다리가 무너질까 염려가 많아서 대학교수들에게 자문도 구하고, 다리에 버팀대를 설치해서 겨우 건널 수 있었어요.”

 삽화2



긴 세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장 고문은 첫 발령을 받은 서울지점에서 전용품 발송 업무를 담당했던 일을 할 때를 꼽았다. 동축 케이블과 다른 전화선 설치용 장비들을 화차에 실어 전국으로 발송하는 업무였다. 당시 전화용 동축 케이블은 구리, 납 등을 써서 무거웠을 뿐 아니라 고가품이었다.

“케이블을 크레인으로 들어서 철도 화차에 집어넣는데, 그 화차에 내가 올라가서 제대로 실리는지 확인을 했어요. 여차하면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어서 위험하지요. 또 그렇게 실어 보내도 기차 곡선궤도에서 이게 굴러서 이탈할 수도 있어서 보내 놓고도 잠이 안 오는 거야. 허 참.”


갑자기 비료발송 업무를 맡게 됐을 때는 눈앞이 캄캄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료는 양곡, 양회(시멘트)와 더불어 과거 이른바 3대 민수화물이라 불리는 중요한 화물이었다. 책임이 무거운 업무였지만 전임자가 없는 상태여서 인수인계도 받지 못했고, 일을 처음부터 배우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경기, 전남 등 전국 각지로 보내는 서류를 만들 땐 ‘먹지를 몇 장씩 뒤에 대서 똑 같은 서류를 만들어서 보냈다’면서 복사기가 없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웃음짓기도 했다.
장 고문은 꼼꼼하고 성실하게 업무에 매진한 덕분에 회사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 사원이었던 1972년 미수채권 회수강조 월간 중 우수한 실적을 낸 공로로 대표이사 표창장을 받았고, 같은 해 회사에서 우수한 사원을 대상으로 선발하던 모범사원에 선정되기도 했다. 재직 중 바쁜 시간을 쪼개 대학원을 마치고 세무사 시험에도 당당히 합격해 전문직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자기 계발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삽화3 


“옛날엔 선배들이 일을 쉽게 가르쳐 주는 법이 절대 없었어요. 지식이나 이런 것이 자기 재산이라는 거지. 후배들은 어깨너머로 선배들이 하는 걸 보고 알아서 배워야 하는 게 대부분이었어요. 알려달라고 매달리고 배우려고 하고 하면 그럴 때나 아주 조금 알려주는 거지.”

 
과거를 회상하는 장 고문의 아련한 시선 너머로 수십여 년 전, 지식에 대한 궁금증과 답답함을 깨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노력한 청년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장감수 고문님
장갑수 고문님

장 고문은 1998년 31년여의 회사 생활을 마무리했다. 회사를 떠나 밖에서 보는 CJ대한통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는 회사가 글로벌 물류기업으로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며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오늘날 회사의 성장은 후배 임직원 여러분의 피와 땀의 결정체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에는 또한 항상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선배의 노력이 깃들어 있기도 합니다. 선배들이 그간 걸어온 길은 평탄하기만 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격동기, 혼란기에도 나만이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 정신으로 이겨내 왔고, 그것이 오늘의 자랑스러운 CJ대한통운이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장 고문은 특히 후배 임직원들에게 "지금처럼 꾸준히 충실하게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해 주시고, 내 회사라는 정신으로 임한다면 어떠한 난관도 이겨낼 수 있다"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장 고문은 퇴직 이후 세무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한동안 모 대학의 겸임교수로 활동하면서 현업에서 쌓은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한편 국제물류 관련 서적 두 권을 저술하기도 했다. 현재는 세무사무소 법인의 대표 세무사로서, 또 통우회 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4년에는 통우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삽화3

 
"통우회는 CJ대한통운 퇴직 임직원들의 쉼터이자 열린 만남의 장소로서 사회참여, 자원봉사 등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회사의 지원으로 좋은 행사를 많이 가질 수 있어 회원들 역시 감사의 마음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한편 올해 회사 창립 90주년의 의의에 대해 장 고문은 "해방과 625 동란의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꿋꿋이 국가 물류의 최선두에 서서 경제발전의 중추적 소임을 다한 회사가 우리 CJ대한통운"이라고 말했다.
 
"우리 회사는 물류업계 선두라는 자부심과 모든 선후배 구성원의 긍지, 따뜻한 정이 모여 90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달려왔고, 또 앞으로 100년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회사의 90주년을 축복하며 오늘날 CJ대한통운을 다녔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게 하는 회사를 있게 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앞으로 10년 뒤, 임직원들과 함께 100주년을 자축하고 싶습니다."




약력

인쇄 최적화를 위한 설정

* Internet Explorer는 [인쇄 미리보기]에서 아래와 같이 설정하셔야 합니다.

1. 필수 항목
- [설정]에서 배경 및 이미지도 인쇄할 수 있도록 체크

2. 선택 항목
- 여백 없음 또는 0으로 설정
- 화면 배율 65% 설정 (추천)

SNS 공유 및 프린트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