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택배사업본부장이었던 하병욱 전 부사장(이하 하 부사장)은 택배사업 초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92년에 본사에서 기획실장으로 있으면서 이걸 본격적으로 추진해보자, 하면서 해외 출장을 다녀왔어요. 현지 실사를 해보고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92년 말에 확정해서 최종 결재를 받았고, 특송사업본부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꾸려서 초대 본부장을 겸직하게 됐습니다.”
사실 하 부사장은 68년 입사해 31년간 전국 주요 항만사업장만 8곳을 거친 항만사업 전문가다. 그가 택배사업과 연이 닿은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하 부사장은 1968년 대한통운의 민영화 공채 1기(공채 6기)로 회사에 입사해 제주, 마산, 동해지점장과 울산지사장, 본사 기획실장, 특송사업본부장, 포항, 부산, 인천지사장을 역임하며 회사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50여 년 전, 그는 대한통운 첫 공채 모집에 응시하면서 회사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대한통운은 한국전력, 농협, 대한석탄공사 등과 함께 국내 최고의 기업으로 손꼽혔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 있는 한 암자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잠시 부산 누님댁에 들렀다가 신문에서 ‘민영화의 기수를 찾습니다’라는 제목의 채용공고를 보게 됐지요. 고민하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을 봤는데 덜컥 합격해 버린 겁니다.”
합격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수석으로 합격을 했다. 수석합격자 혜택으로 근무지를 고를 수 있었는데, 하 부사장은 ‘기왕이면’이라는 생각에 서울 본사를 배치 희망지로 적었다.
“부산 누님댁에 가서 대한통운 서울 본사를 간다고 하니 누님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제가 6형제 중에 막내인데, 누님이 ‘낯선 서울에 너를 혼자 어떻게 보내며 너는 또 서울 어디서 살 거냐’고 하니…’ 부둣가에 가봐라, 저~언시 빨간 트럭에 빨간 창고다. 대한통운이 여기도 많은데 굳이 서울을 가야 하겠니?’”
결국 하 부사장은 바로 심야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 본사로 급 상경, 근무 희망지를 부산으로 바꾸는 해프닝을 겪었다.
그가 처음 발령받은 곳은 부산지점이었다.
“입사하자마자 아무것도 모르는 신참을 4부두 현장으로 보내더군요. 일이 서툴기도 했고 비료를 파이프로 뿜어내 한 시간만 작업하면 얼굴이 먼지 범벅이 돼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었죠. 초겨울 바닷바람은 왜 그렇게 차갑던지… 입사 동기 하나는 민영화의 기수고 뭐고 못 살겠다며 줄행랑을 쳤어요.”
한겨울을 부두에서 보내고, 이듬해 3월 정식발령을 받은 곳이 부산지점 기획과였다.
“기획과에 있으면서 일을 원 없이 했어요. 휴일도 없이 매일 회사에 출근을 했었죠. 어쩌다 휴일에 지점장이 한번씩 지점에 전화를 해요. 그때마다 수화기에 대고 ‘기획과 하병욱입니다’를 크게 외쳤죠.”
10년 뒤 그의 책상에는 영업관리부장이라는 명패가 붙게 된다. 당시에는 관리부장이 수석부장 역할을 했는데, 하 부사장은 지점장에게 영업을 하고 싶다는 희망을 강력하게 피력했고 결국 영업관리부장이라는 전에 없던 직책이 생겨났다.
“관리 쪽에 오래 있었으니 나중에 지점장으로 나가서 일하려면 영업이 필수라는 생각을 했어요.”
결국 그의 목표대로, 그는 3년 뒤 제주 지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나이 사십에 제주에 처음 갔어요. 당시 외형이 보잘것없었습니다. 월 매출이 7300만 원 정도였으니… 인맥을 동원하고 발품을 뛰어서 영업을 했지요. 당시 제주로 들어오는 대규모 물자는 카페리를 통하는데, 부산이나 목포에서 비료 같은 농협물자나 시멘트, 철강 등 공산품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런 물자들의 하역과 운송을 수주해서 3년 뒤에는 월 매출이 10억까지 뛰었어요. 갑자기 일감이 늘어나서 부산과 울산지사에서 인력을 차출 받을 정도였죠.”
제주지사에서의 성과로 이후 하 부사장은 마산, 동해 등 여러 지점들의 지점장을 거치며 지속적인 성과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하 부사장은 울산지점 재직 당시 전국 지점, 지사를 대상으로 성과를 평가해 시상하는 경영대상에서 3년간 5번을 수상하기도 했다.
92년 본사 기획실장으로 발령받은 하 부사장은 택배사업의 기틀을 닦게 된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택배라는 사업 자체가 초기였고 중소업체들이 유사한 형태의 사업을 막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저희도 검토는 84년 정도부터 하고 있었지요. 이걸 본격적으로 해야 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사실 내가 부산이 집이니 서울에 혼자 와 있었는데요.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부산에서 부쳐서 소포로 받았는데 그때 이런 형태의 사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결심을 하고 해외 출장을 가서 운영형태도 보고, 차량도 보고 하면서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지요.”
92년 말 결재를 받은 뒤, 신속하게 추진이 이뤄졌다. 사업을 제안했던 하 부사장이 신설조직인 특송사업본부의 초대 본부장을 맡았다.
당시 대한통운 특송사업부의 전화번호는 현재와 같은 ‘이리 오시오’ 라는 의미의 ‘1255’. 전국 어디서나 국번 구분없이 1255번을 누르면 접수가 가능하게끔 했다. 골목의 쌀가게, 세탁소, 아파트 관리사무소 등을 취급소로 지정해 접근성을 높이고, 향후 국제특송 사업도 진출한다는 청사진도 구상했다. 장기목표는 5년 뒤인 98년까지 연간 취급물량 1천7백만 상자, 매출 1천억 원 고지에 오른다는 것. 지난해 CJ대한통운 연간 취급물동량이 27억 9천만 상자, 매출액이 2조 5,024억 원인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렇게 택배사업의 미래를 구상하던 도중, 하 부사장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 지사를 살려내라는 경영진의 ‘특명’을 받고 포항지사로 향하게 된다. “가봐서 잘 안 되어 실패해도 좋다. 끝나면 원직으로 복귀해도 되고, 그게 싫으면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겠다”는 백지수표식의 인사명령이었다.
고난 끝에 지사를 정상화시키고 다시 부산지사로 자리를 옮긴 하 부사장은 부산 컨테이너 지사와 부산지사 간 통합을 추진해 사업정상화를 이뤄냈고, 이후 인천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지속적인 성과를 창출하던 중 부사장으로 99년, 회사 생활의 마침표를 찍게 됐다.
30여 년 간 청춘을 불사르며 일했던 때를 생각하면 한 점의 후회도 없다는 하 부사장.
“대한통운에서 화려하게 인생을 보냈습니다. 신바람을 일으키면서 일했고요. 제가 화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대한통운이라는 그늘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특히 하 부사장은 마음의 고향 대한통운의 성장을 함께한 산 증인으로서 택배사업이 계속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쁜 마음이 든다고 말한다.
퇴임 이후 물류업체 운영과 부산상공회의소 항만수송분과 상임위원 등을 역임한 하 부사장은 CJ대한통운 부산동우회를 창설해 회원 360여 명, 준회원 550명의 조직으로 키워내기도 했다.
회사의 창립 90주년에 대해 하 부사장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다”고 소회를 밝혔다.
하 부사장은 또 “우리 선배들이 지는 해라면 후배님들은 뜨는 해”라면서 “후배님들이 만들어갈 빛나는 미래의 회사를 고대하며 기대한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하 부사장은 양복상의 안주머니에서 곱게 잘라 접은 회사 관련 최근 신문 기사 몇 장을 꺼내 보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CJ대한통운은 아직도 늘상 떠올리곤 하는 고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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